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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AI

"귀찮은 건 돈으로 삽니다" 크로캔슬 시대 디자인마저 아웃소싱하는 사람들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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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건 돈으로 삽니다" 

크로캔슬 시대, 디자인마저 아웃소싱하는 사람들

물건을 하나 살 때 우리가 지불하는 건 가격표에 적힌 숫자만이 아니다. 뭘 살지 찾아보고, 비교하고, 후기를 뒤지고, 잘못 고르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그 모든 과정에도 사실은 비용이 들어간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격표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격표'가 하나 더 붙어 있는 셈이다.

일본에서는 이걸 크로캔슬(苦労キャンセル)이라는 말로 부른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생 회피' 정도가 되는데, 2026년 소비 트렌드를 정리할 때 자주 언급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 자체를 생략해버리는 소비 태도. "굳이 안 해도 되는 고생이라면, 돈을 내고서라도 하지 말자"는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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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든 '고생 회피'

사실 편리함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반찬가게가 잘되는 이유도, 식기세척기가 팔리는 이유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요즘의 고생 회피 소비는 조금 결이 다르다. 단순히 편한 걸 좋아하거나 게을러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귀찮은 과정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분리수거를 당연히 본인이 직접 했다. 하지만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가 늘고 다들 바빠지면서, 씻고 분류해서 정해진 날 내다 버리는 그 일 자체가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재활용 쓰레기를 밖에 내놓기만 하면 나머지를 대신 분류해주는 구독 서비스가 등장했다. 이건 단순히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는 서비스'가 아니라, "오늘이 분리수거 날인가?" 같은 매일 반복되는 작은 스트레스 자체를 없애주는 서비스다.

정보 과잉 시대에 AI가 하는 역할도 비슷하다. 요즘은 외국 논문이나 기사를 볼 때 생성형 AI로 먼저 번역을 돌려보고, 쇼핑할 때도 AI 추천을 받는 경우가 흔하다. 예전엔 "내가 다 찾아봐야지"였다면, 지금은 "굳이 내가 다 비교할 필요 있나, AI가 골라준 걸 한 번 확인하면 되지"로 바뀐 것이다. 정보가 부족했던 시대엔 많이 아는 사람이 유리했지만,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은 필요한 것만 걸러주는 큐레이션 서비스가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돈을 더 내고 줄을 건너뛰는 사람들

이 흐름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다이나믹 프라이싱이다. 놀이공원 패스트패스는 이제 익숙하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이게 음식점까지 확산됐다. 교토의 한 유명 소바 전문점의 경우 평일 한 그릇에 약 12,000원이던 가격이, 혼잡할 때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먹으려면 약 75,000원까지 치솟는다고 한다. 평소 가격의 6배를 내고서라도 대기 시간을 없애겠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건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소위 '부유층'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용객의 약 70%가 20~30대였고, 중위 연봉 수준의 이용자도 상당수였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관광이나 데이트처럼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패스트패스 구매자의 90%가 외국인 관광객이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여행이라는 한정된 시간 앞에서는 시간의 가치가 그만큼 크게 느껴지는 셈이다.

퇴사도, 이별도 대신해주는 시대

고생 회피는 소비를 넘어 인간관계의 영역까지 번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퇴직 대행 서비스가 활발한데, 근로자를 대신해 회사에 사직 의사를 전달하고 연차·퇴직금 정산 같은 절차까지 처리해준다. 입사 당일 점심시간에 바로 퇴직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상사 얼굴을 마주하며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의 불편함마저 돈으로 지우는 셈이다.

도쿄 상공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이런 대행 서비스를 이용한 기업 비율이 2025년 15%에서 2026년 21%로, 1년 만에 5%포인트나 올랐다. 일본 기업 10곳 중 2곳 이상이 이런 서비스를 통해 퇴사한 직원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남녀 이별을 대신 통보해주는 것을 넘어, 이별 시나리오를 짜고 배우까지 투입해 상황극을 해주는 서비스도 존재한다고 한다.

크리에이티브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 '고생 회피' 흐름이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빠르게 파고든 분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디자인이다.

AI 디자인 도구는 데이터와 패턴을 기반으로 몇 초 만에 결과물을 뽑아낸다. 빠르고, 일관되고, 저렴하다. 반면 인간 디자이너는 공감과 경험,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브랜드에 의미와 신뢰를 불어넣는다. 러닝화 광고 이미지는 AI가 뚝딱 만들어내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커피 브랜드 비주얼에는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실제 수치도 이 변화를 뒷받침한다. 업계 조사에 따르면 현재 디자이너의 75%가 AI 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2023년의 35%에서 두 배 넘게 늘어난 수치다. 기업 차원에서도 88%가 어떤 형태로든 AI 디자인 도구를 활용하고 있고, 36%는 최소 한 가지 디자인 업무를 이미 AI로 대체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AI가 일상적인 디자인 작업 시간을 50~80%까지 단축시킨다는 조사 결과다. 로고 시안 몇 개, SNS 카드뉴스, 배너 이미지처럼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딱히 즐겁지 않은' 반복 작업들이 정확히 크로캔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 규모로 봐도 AI 기반 디자인 도구 시장은 2026년 한 해에만 82억 2천만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AI는 속도를 위해, 사람은 영혼을 위해(Use AI for Speed, Use Human for Soul)"라는 말은 크로캔슬 소비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다. 굳이 사람이 반복해서 할 필요 없는 시안 작업은 AI에게 맡기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좌우할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람의 판단을 남겨두는 것.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자원의 재배치에 가깝다.

그래도 공짜는 없다

물론 고생 회피에는 부작용도 따라온다. 첫째, 판단력이 약해진다. AI가 골라주는 것만 계속 받다 보면 스스로 비교하고 검증하는 힘이 줄어든다. 둘째, 알고리즘 의존이다. 내가 고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AI나 플랫폼이 보여준 선택지 안에서만 고르게 되면서, 오히려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셋째,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 비용 증가다. 구독료, 배달비, 수수료, 프리미엄 요금까지 고생을 돈으로 바꾸다 보면 생활비 자체가 조용히 불어난다.

결국 관건은 "이건 굳이 내가 안 해도 되는 고생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관여해야 하는 일인가"를 구분하는 감각이다. 디자인이든, 분리수거든, 퇴사 통보든 무엇을 아웃소싱하고 무엇을 남겨둘지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새로운 소비 리터러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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