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산 아래, 가을이 머무는 마을
어느 시골에서 담아 온 가을 한 장면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오지만, 떠날 때는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포천 가채리 이번 가을날의 하루가 꼭 그랬습니다.
하나. 푸른 하늘 아래, 가랑산이 품은 마을
아침 햇살이 맑게 내려앉은 가채리는 유난히 하늘이 높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푸른 하늘 아래로 가랑산 능선이 완만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산은 아직 초록을 다 내려놓지 못했는데, 그 사이사이로 주황빛과 갈색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물든 산보다 이렇게 물들어 가는 산이 더 마음을 붙잡습니다. 끝이 아니라 '지나가는 중'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산자락 아래에는 붉은 지붕과 회색 지붕의 집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고, 그 앞으로 비닐하우스와 텃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전봇대 사이로 늘어진 전선마저 이 풍경에서는 정겨운 선 하나처럼 보였습니다.




둘. 둑방길에서 만난 물가의 가을
마을 앞을 흐르는 물가로 걸음을 옮기면 풍경은 또 한 번 달라집니다. 물가를 따라 억새와 풀들이 누렇게 익어 가고, 건너편 언덕에는 은행나무가 노란 불을 켠 듯 서 있었습니다. 잔잔한 수면 위에는 그 모든 풍경이 거꾸로 내려앉아 있었지요.
물 위에 비친 집과 나무를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흔들리고, 멈추면 다시 선명해지는 풍경. 현실의 마을보다 물속의 마을이 더 고요해 보여서,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둑방 위에 서 있으면 단풍과 둑과 물이 서로 어울려 한 편의 수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굳이 문장으로 옮기지 않아도 이미 글이 되어 있는 풍경이랄까요.



셋. 하늘이 걸어 둔 모과, 땅이 내어 준 감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에 노란 모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잎은 거의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는데, 그 끝에 울퉁불퉁한 모과들이 환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못생겼다고 놀림받는 과일이지만,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니 어느 보석보다 따뜻한 빛이었습니다. 코끝을 가까이 대지 않아도 은은한 향이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한켠, 밭 옆을 지키는 감나무 한 그루. 이파리는 다 보내고, 가지마다 주황빛 감만 가득 매달고 서 있었습니다. 사다리 하나가 나무 곁에 기대어 있고, 그 아래 개집 앞에서는 하얀 강아지가 느긋하게 가을 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곧 감을 따러 올 손길을 기다리는 듯한 풍경이었어요. 시골의 가을은 이렇게 '기다림'이 풍경이 됩니다.





넷. 소나무 너머, 부지런한 사람들의 가을
소나무 한 그루 너머로는 가을걷이 후의 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파란 트럭과 트랙터,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 한쪽에는 거둬들인 가지와 줄기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가을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한 해 땀이 마무리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텃밭에는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었습니다. 보랏빛 가지 잎사귀가 반짝이고, 콩잎과 배추는 늦가을 햇살을 한껏 받아 싱싱했어요. 가지 잎 너머로 붉은 벽돌집이 흐릿하게 보이던 장면은, 사진으로 남기길 정말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다섯. 오로라처럼 번진 저녁 하늘
그리고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해 질 무렵에 찾아왔습니다.
하루를 그렇게 맑게 보냈는데, 저녁이 되자 하늘이 갑자기 마음을 열어 보였습니다. 처음엔 연분홍으로 시작했습니다. 구름 사이로 스며든 빛이 마을 위를 은은하게 덮었지요. 그러다 점점 보랏빛이 깊어지고, 그 사이로 산호색 노을이 불꽃처럼 번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오로라인 줄 알았습니다. 보라와 분홍, 주홍이 층층이 겹친 하늘은 현실감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어요. 아파트의 실루엣, 지붕, 전선, 나뭇가지까지 모두 검은 그림자가 되어 하늘의 색을 더 돋보이게 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늘 전체가 복숭아빛으로 물들었고, 붉은 지붕도 파란 처마도 그 빛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참을 말없이 서서 하늘만 올려다보았습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조명도 이만큼 다정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면서요.





맺으며, 가을이 남기고 간 것
돌아와 사진을 하나씩 넘겨 보니, 이날 하루는 이렇게 흘러가 있었습니다.
푸른 아침의 산, 물가의 노란 은행나무, 하늘에 걸린 모과, 주황빛 감나무, 땀 냄새 나는 가을 들판, 그리고 보랏빛으로 저무는 하늘.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이름난 명소가 아니어도, 가랑산 아래 가채리의 가을은 충분히 깊고 넉넉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멀리서 아름다움을 찾지만, 사실은 걸어서 닿는 동네 어귀에 가장 진한 계절이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올가을, 하루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어쩌면 당신의 동네 위에도 오로라 같은 저녁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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