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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에서 온 황제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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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에세이

작은 섬에서 온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삶과 야망, 그리고 그가 남긴 것들에 대하여


Napoleon Bonaparte · 1769 — 1821

역사에는 가끔, 한 사람의 존재가 시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혁명의 불꽃이 유럽 전역을 태우던 시대에, 코르시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고, 대륙의 지도를 손으로 빚어냈으며, 마침내 대서양 한가운데 외로운 섬에서 생을 마쳤다. 이 모든 것이 불과 52년 안에 일어난 일이다.

그를 처음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키 이야기다. '꼬마 나폴레옹'이라는 별명, 단신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세계 정복의 동력이 되었다는 이른바 '나폴레옹 콤플렉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키는 약 168센티미터로,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 신장과 거의 같았다. 이 오해는 영국 언론과 풍자 화가들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였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조롱으로 이기려 했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 허구의 이미지가 실제 나폴레옹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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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포화 속에서 피어난 별
1769년 8월 15일, 나폴레옹이 태어난 코르시카는 프랑스가 제노바로부터 매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섬이었다. 그의 집안은 이탈리아계 소귀족이었고,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 코르시카 독립을 꿈꾸던 민족주의자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자랐다.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기보다 코르시카인으로 여기던 소년이, 훗날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된다는 것은 역사가 즐겨 쓰는 역설이다.

파리 사관학교에 입학한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방인이었다. 억양이 달랐고, 귀족 동기들처럼 세련되지 못했으며, 늘 가난했다. 그러나 수학과 전술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2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한 그는, 귀족들이 기피하던 포병이라는 병과를 오히려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계산과 정밀함을 요구하는 포병 전술은 그의 두뇌에 맞춤이었다.

세상이 처음 그의 이름을 주목한 것은 1793년 툴롱 포위전이었다. 영국과 스페인 연합군에게 빼앗긴 항구도시를 탈환하는 작전에서, 불과 24세의 젊은 장교는 대담한 포진 전술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날 밤 그는 준장 계급장을 달았다. 프랑스 혁명의 혼돈 속에서 별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진짜 전설은 1796년에 시작되었다. 27세의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직함뿐이었다. 군대는 굶주렸고, 사기는 무너진 지 오래였으며, 보급품은 거의 없었다. 그는 첫날 병사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나는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이끌 것이다. 명예도, 영광도, 부도 그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후 14개월 동안 나폴레옹은 14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두 번째 이야기
황제의 탄생, 그리고 정점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제1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는 영웅이었다. 혁명의 혼란이 너무 길었고, 전쟁의 피로가 너무 깊었다. 프랑스는 강한 손을 원했다. 나폴레옹은 그 손이 되었다.

황제 즉위는 1804년 12월 2일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에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막상 왕관을 씌워야 할 순간, 나폴레옹은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가져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얹었다. 이 장면 하나가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가장 잘 설명한다. 신도, 교황도, 전통도 그에게 황제의 자리를 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황제로 만든 사람이었다.

황제로서 그가 한 일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 법전을 선포하여 프랑스 민법의 토대를 세웠고,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금융 시스템을 근대화했다. 전국에 리세라는 고등학교 제도를 만들어 교육을 보통 사람들에게 열었다. 레종도뇌르 훈장을 창설하여 귀족 혈통이 아닌 능력과 공헌으로 영예를 수여했다. 미터법의 전국 통일도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뼈대라고 불리는 것들이 대부분 나폴레옹 시대에 만들어졌다.

전장에서 그의 전성기는 1805년 아우스터리츠였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군 9만 명을 7만의 프랑스군으로 격파한 이 전투는, 군사사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나폴레옹은 적장들이 자신의 오른쪽 측면을 공격하도록 유도한 뒤, 일부러 약하게 보이도록 놔둔 중앙을 뚫어 적군을 둘로 갈라놓았다. 안개 속에서 펼쳐진 이 작전을, 후세의 군사학자들은 '황제들의 전투'라 불렀다.

세 번째 이야기
야망이 스스로를 잡아먹을 때
인간이 위대해지는 것과 인간이 파멸하는 것은, 때로 같은 힘에서 비롯된다. 나폴레옹을 정점까지 끌어올린 것은 무한한 야망이었다. 그리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도 바로 그 야망이었다.

1812년 여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당시 유럽에서 동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을 쏟아부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싸우는 대신 후퇴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없애고, 광활한 땅으로 적군을 끌어들였다. 나폴레옹은 빈 들판을 행군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이미 불타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수도에 불을 질렀다.

겨울이 왔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러시아의 혹한 속에서 60만의 대군은 무너졌다. 보급선은 끊겼고, 말들이 먼저 쓰러졌으며, 군화가 얼어붙은 발에서 벗겨지지 않았다. 프랑스로 귀환한 병력은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퇴각이었다. 한 병사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혔다고 전해진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걸어가는 고통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빠르게 흘렀다.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하나로 뭉쳤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과 맞섰다. 사방이 적이었다. 이듬해 봄, 나폴레옹은 처음으로 퇴위를 선언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쉽게 끝날 리 없었다. 1815년 3월, 그는 엘바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왔다. 왕정을 복구하고 자신을 체포하러 보낸 군대는, 나폴레옹 앞에 서자 무기를 내려놓고 오히려 그를 따랐다. 파리는 다시 그의 것이 되었다. 이 기적 같은 100일이 '백일천하'다.

끝은 워털루였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한 들판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과 마지막 승부를 벌였다. 전투는 하루 만에 끝났다. 나폴레옹의 공격이 몇 시간 늦어진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만약 그날 아침 지면이 조금 더 빨리 굳었다면, 만약 프로이센군이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면 — 역사는 '만약'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나폴레옹의 패배였다.

마지막 이야기
세인트헬레나의 바람 속에서
두 번째 유배지는 엘바보다 훨씬 멀었다. 대서양 한가운데, 아프리카 서쪽 해안에서 2,000킬로미터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 영국은 이번에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보냈다. 나폴레옹은 그곳에서 6년을 보냈다. 바람이 강하고 날씨가 변덕스러운 섬에서, 한때 유럽의 황제였던 남자는 날마다 회고록을 구술하고 정원을 가꾸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세인트헬레나에서 자신의 신화를 직접 썼다.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을 혁명의 수호자로, 민족들의 해방자로 묘사했다. 전쟁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유럽의 반동 세력이 강요한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이 전부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구술한 이야기들은 19세기 내내 유럽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빅토르 위고도, 베토벤도, 괴테도 그에게서 무언가를 보았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눈을 감았다. 공식 사인은 위암이었지만, 비소 중독을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프랑스어로 "프랑스… 육군… 선봉대…"였다고 전해진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병사였다.

오늘날 나폴레옹의 유산은 기묘하게 살아있다. 그가 선포한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40개 이상의 국가 법체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민법이 다른 주와 다른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창설한 프랑스 은행은 지금도 프랑스 경제의 중심이다. 그의 침략이 뿌린 저항의 씨앗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민족주의를 깨웠고, 결국 19세기 유럽 민족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대 유럽의 설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남긴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한 인간이 시대를 만드는가, 아니면 시대가 한 인간을 만드는가. 나폴레옹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답이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둘 다인 것 같기도 하다. 혁명이라는 시대가 그를 키웠고, 그는 다시 그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빚었다. 그 긴장 속에서 하나의 전설이 태어났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불굴의 의지를 보고, 그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끝없는 전쟁과 희생을 떠올린다. 어느 쪽이든, 나폴레옹은 사람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인물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 관한 책이 매년 수백 권씩 출판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코르시카의 작은 섬에서 온 그 남자는, 세인트헬레나의 바람 속에서 사라진 뒤로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이 글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교육 목적의 에세이입니다. · 1769–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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