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SF를
이미 앞질렀다
KBS 다큐인사이트 《인재전쟁2: 차이나 스피드》를 보고 — 로봇이 달리고, 드론이 날고, 사막이 빛을 모으는 나라 이야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입이 떡 벌어진 게 언제였나 생각해보면, 이번이 꽤 오랜만이다. KBS가 연달아 내놓은 《인재전쟁2》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대륙의 실수'나 '짝퉁 공화국'으로 기억하던 감각을 완전히 해체해버렸다. 편견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90분이었다.
1년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다큐를 연출한 정용재 PD는 작년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휴머노이드 로봇 마라톤 대회. 당시에는 20여 대가 출전해 출발선에서 고꾸라지거나, 비틀비틀 걸음마나 겨우 떼는 수준이었다. 제작진은 느긋하게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촬영하기에 딱 좋은 포지션으로.
그런데 1년 뒤, 같은 자리에 섰더니 로봇들이 순식간에 치고 나가버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다 싶을 정도"라는 그 말이 묘하게 여운을 남긴다. 로봇의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니라, 세상이 변하는 속도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작년과 너무 다르게 너무 빠르게 출발해버리니까, 자리를 잘못 잡았다 싶을 정도였어요. 정말 1년 사이지만 그 속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정용재 PD, KBS 다큐인사이트 인터뷰 중PD 본인이 러닝머신에서 직접 달리는 장면도 나온다. 하프마라톤까지 뛰어본 사람이 전력으로 달렸더니 초속 7미터. 자신 있게 뛰었고, 충분히 빠르다고 느꼈다. 그런데 같은 러닝머신 위에서 로봇은 초속 11미터를 아무렇지 않게 찍어버렸다. 직접 뛰어보지 않으면 그 숫자가 얼마나 현실적인 충격인지 모른다. 그래서 굳이 뛴 것이고, 그래서 화면 앞 우리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기 최고 속도
동시에 들어올리는 하중
발전소 거울 수
넘어지는 것도 데이터다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관점 전환 중 하나는 '공개된 실패'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국은 로봇이 넘어지는 장면, 걷다가 쓰러지는 장면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공개한다. 인터넷에서 조롱의 밈이 되기도 한다. "저거 몇 미터 못 가서 넘어지네." 우리도 많이 봤다.
그런데 정용재 PD의 해석은 달랐다. 그 실패 영상들이 전부 학습 데이터로 쌓인다는 것. 실험실 밖에서 실제로 달려보고, 점프해보고, 쓰러지면서 얻는 실증 데이터가 알고리즘을 키운다. 2024년 올해의 조롱이 2025년 마라톤의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다큐가 보여준 중국의 기술 생태계
- 항저우 한 곳에서만 유니트리(휴머노이드), 딥로보틱스(4족보행로봇), 브레인코(뇌과학) 등 '항저우 6룡' 배출
- 아이디어와 설계만 있으면 OEM 공장에서 휴머노이드 부품 주문 조립 가능 — 마치 스마트폰 케이스 주문하듯이
- 전 세계 공대 상위 10개 대학 중 9개가 중국. 나머지 하나가 하버드
- 국가가 인정한 상위 1% 과학자 1,000명이 과학 정책을 직접 결정하는 구조
- 2조~5조 원 자산을 보유한 30대 이하 창업자가 20~30명에 달하는 '슈퍼 영리치' 세대
드론은 이미 생활이 됐다
드론 취재 분량도 압권이었다. 우리가 아는 드론 — 촬영용, 불꽃놀이 대신 쓰는 군집 드론 — 을 훨씬 넘어섰다. 건물 외벽 물청소 드론, 화재 진압 드론, 인명 구조 드론, 산 위로 1톤 화물을 들어올리는 4대짜리 크레인 드론, 선박 통관 절차를 대신하는 해양 드론까지. 그리고 드론 택시.
정용재 PD가 실제로 탑승했다. 조종은 없다. 목적지를 찍으면 스스로 날아간다.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이었는데도 문제없이 이착륙했다. "심장이 떨렸고, 기체 진동도 살짝 있었다"고 했다. 진동은 아직 개선 여지가 있다지만, 기술적 완비 자체는 이미 끝났다는 뉘앙스였다. 돈을 내면 탈 수 있다. 지역·시간 제한이 있을 뿐, 시스템은 준비돼 있다.
사막에 펼쳐진 12,000개의 거울
AI 경쟁에서 가장 간과하기 쉬운 변수가 전력이다. AI 검색 엔진 하나가 일반 검색보다 전력을 약 10배 더 소모한다. 일론 머스크, 샘 알트만, 마크 저커버그가 이구동성으로 '전력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유다. 반도체가 아무리 좋아도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이 문제를 국가 정책으로 풀기 시작했다. 석탄과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태양광·풍력·수력·원자력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에너지 안보와 AI 대비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것이다.
처음엔 조감도 같은 CG인 줄 알았다. 직접 들어가 보니 제작진 전부가 압도당했다. 할 말을 잃었다.
— 정용재 PD, 집광형 태양열 발전소를 방문하고사막에 설치된 집광형 태양열 발전소 영상이 다큐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였다. 거대한 거울 12,000개가 단 하나의 타워를 향해 햇빛을 집중시킨다. 어릴 때 돋보기로 하던 그것을, 12,000배 규모로 사막 한가운데서 실현한 것이다. 그 열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방송 화면을 보면서도 CG가 아닌지 의심했다는 시청자들이 많았는데, PD 본인도 현장에 가기 전까지 믿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사람이 만든다 — 인재를 대하는 방식
다큐의 제목이 '인재전쟁'인 이유는 명확하다. 기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중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앞으로 중국을 먹여 살릴 것은 인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해외에 나가 있는 중국계 학자들과 외국 석학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교 '투링반'을 설계한 존 호크로프트 코넬대 교수(튜링상 수상)가 다큐에 등장한다. 그가 자문을 했더니 실제로 정책이 바뀌었다고 증언한다. 15개 넘는 나라에서 교육 자문을 했지만, 조언을 듣고 실제로 바꾼 나라는 중국이 처음이었다고. 한국에서 정년퇴직한 교수도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되는 사례가 이미 나오고 있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2부 '코리아 딜레마'는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의사와 변호사의 업무를 대체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의대 입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반도체 공학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졸업 전에 학교를 떠나고 있다. 기술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위기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쌓이는 중이다.
베이징에 사는 한 시청자가 라디오 인터뷰에 문자를 보냈다. "여기 현실은 그냥 미래 도시입니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말하면 반신반의해요." 그 말이 다큐 전체를 요약하는 것 같다. 무서운 건 중국의 속도가 아니다. 우리가 그 속도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게 더 무섭다.
《인재전쟁2》는 KBS 유튜브 채널과 KBS콩에서 전편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보고 나서 불편하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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