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병다육이부부, 제주 3박4일의 마지막 발걸음 한라수목원에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눈에 담는 풍경 하나하나가 더 또렷해지기 때문일까.
사흘 동안 비를 머금었던 제주의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게 걷히던 날, 우리는 마지막 일정으로 한라수목원을




산책길에 들어서자마자 마중 나온 건 짙은 초록의 터널이었다. 가로수들이 머리 위로 가지를 뻗어 만들어낸 자연의 아치 아래로, 빗물에 젖었다 마른 보도블록 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길 양옆으로는 분홍빛 철쭉이 수줍게 피어 있었고, 발끝에 닿는 그늘은 한낮의 더위를 잊게 할 만큼 깊고 서늘했다.


수목원 안쪽 깊숙이 들어가니 작은 이름표를 단 나무들이 하나씩 우리를 맞아주었다. 비파나무, 담팔수… 낯선 이름들 옆에 적힌 학명과 설명을 한 줄씩 읽어 내려가는 일이 뜻밖에도 즐거웠다. 비파나무 가지에는 아직 푸른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는데, 7월이면 노랗게 익을 거라는 안내문을 보며 다음 계절을 살짝 그려보기도 했다. 담팔수는 희귀식물로 보호받는 나무라고 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생명들이 새삼 귀하게 느껴졌다.
대나무 숲길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곧게 뻗은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바닥의 댓잎 위에 얼룩무늬를 그렸다. 나무 데크 위에서 사진을 찍는 다른 여행객들의 뒷모습마저 그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펼쳐진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이끼 낀 굵은 나무줄기들이 서로 기대듯 서 있고, 그 틈으로 멀리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나무껍질에 붙어 자라는 작은 풍란과 콩짜개덩굴이 마치 나무에게 옷을 입혀준 듯 정겨웠다.


분재 전시 온실로 들어서니 풍경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작은 화분 안에 거대한 자연을 축소해놓은 듯한 돌과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구멍이 송송 난 현무암 위에 가느다란 풀들이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고, 한국춘란을 담은 작은 도자기 화분들은 단아한 멋을 풍겼다. 유리창 너머로는 또 다른 진열장이 보였는데, 선반마다 가지런히 놓인 제주의 돌과 뿌리 조각들이 마치 시간이 빚어낸 조각품 같았다.



수목원을 한 바퀴 다 돌고 나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옥상 정원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둥근 향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천막 아래로 따스한 알전구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낮 동안 걸었던 길들을 되짚어보며, 이번 여행이 정말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저녁은 일찍 먹기로 했다.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야 했으니 더 늦출 수도 없었다. 자리에 앉으니 곧 정갈한 밑반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묵은지무침, 톡톡 씹히는 콩나물무침, 전복과 문어초무침, 그리고 보글보글 끓는 갈치조림 두 그릇이 식탁 양쪽에 놓였다. 매콤달콤한 양념이 잘 스며든 갈치를 한 점 떠서 입에 넣으니, 사흘간의 여독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이렇게 따뜻하고 든든해서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스쳐 가는 제주의 풍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한라수목원의 푸른 그늘,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 분재 화분 속에 담긴 작은 우주. 그리고 마지막 만찬의 따뜻한 온기까지.
짐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여행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잠깐의 멈춤이라고. 와인병처럼 천천히, 다육이처럼 단단하게 살아가던 우리 부부에게 이번 제주 3박4일은 작은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내일 새벽, 비행기가 다시 하늘로 오르면 이 푸르렀던 며칠도 마음 한편에 조용히 접혀 들어가겠지. 그래도 괜찮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이 여행에서 충분히 채워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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