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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끝에서 고대와 나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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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끝에서,
고대와 나

Peru · Bolivia · Ecuador · Chile · Venezuela


Chapter One · Peru
삭사이와만, 잉카의 숨결
Sacsayhuamán · Cusco, Peru

빗방울이 돌 위에 맺혔다. 쿠스코 해발 3,700미터, 잉카인들이 수백 톤의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이 거대한 성채 앞에 나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모르타르 없이, 기계 없이 오직 손과 의지만으로 이 돌들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산을 쥔 손이 차가웠다. 먹구름이 안데스 봉우리를 삼킬 듯 내려앉았고, 빗소리는 어딘가 먼 시간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5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딘 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젖은 흙 내음, 차가운 바람, 그리고 이 압도적인 공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작아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곳에서 오래된 나를 만나는 일이 아닐까. 남미의 고원과 밀림과 절벽 위에서, 나는 조금씩 그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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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Two · Bolivia
푸마 풍쿠, 수수께끼의 돌
Puma Punku · Tiwanaku, Bolivia

알티플라노의 바람은 가차 없었다.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근처, 해발 3,900미터의 광활한 고원 위에 수백 개의 돌덩이들이 마치 폭발에 의해 흩어진 것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이 돌들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어떻게, 왜 이것을 만들었는가. 1,500년이 지나도 대답은 없다."
정밀하게 깎인 단면, 대칭적인 구멍들,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운반된 안산암. 고고학자들조차 여전히 논쟁 중인 이 유적 앞에서 나는 인류의 능력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동시에 느꼈다.

하늘은 무겁고 회색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돌들의 표면이 더 선명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차가운 돌을 만졌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

Chapter Three · Ecuador
툴리페,밀림 속의 원
Tulipe Archaeological Site · Ecuador

나는 정글 속에서 원을 만났다. 에콰도르 북서부, 안개가 자욱한 열대우림 한가운데 야코 문화가 남긴 원형 수조들이 조용히 빗물을 담고 있었다.

"돌로 새긴 원 안에 하늘이 고였다. 그것은 천문관측소였고, 제의 공간이었고, 우주를 담으려는 인간의 오랜 소망이었다."
아무도 없는 유적에 혼자 섰다. 습한 공기, 새소리, 이름 모를 꽃향기. 반바지와 트레킹화 차림으로 나는 이 고요한 공간의 한가운데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에콰도르는 '적도'라는 뜻이다. 지구의 한가운데, 이 원형의 유적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지구 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고대인들은 돌 위에 별을 새기고, 밀림 속에 원을 그렸다. 수천 년이 지나 나는 그 앞에 서서 여전히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Chapter Four · Chile
라파 누이,바다 끝의 얼굴들
Ahu Tongariki · Easter Island, Chile

이스터 섬. 지구에서 가장 고립된 곳이라 불리는 이 섬에서 15기의 모아이가 등을 대고 서있다. 파도는 검은 현무암 위로 부서지고, 그들은 섬 안쪽을, 살아있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상들이 섬을 지킨다. 라파 누이 사람들은 모아이가 마나(mana), 즉 신성한 힘을 품고 있다고 믿었다."
바람이 너무 강해 걸음조차 흐트러졌다. 파란 재킷이 요동쳤다. 하지만 모아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람도, 세월도, 고독도 그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앞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무언가를 이렇게 단단하게 믿은 적이 내게도 있었던가. 거친 파도 소리 속에서 그 물음은 오래도록 울렸다.

Chapter Five · Venezuela
로라이마,구름 위의 세계
Mount Roraima Tepui · Venezuela

마침내 나는 세상의 꼭대기에 섰다. 베네수엘라의 로라이마 테푸이, 해발 2,810미터 절벽 위. 구름은 발아래에서 끓어오르고 수억 년의 시간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었다.

"테푸이는 살아있다. 그것은 지질학적 시간의 증인이며, 코난 도일이 《잃어버린 세계》를 쓰게 한 영감의 땅이다."
폭풍이 몰려왔다. 구름이 벽처럼 솟구쳐 절벽을 삼켰다. 그 순간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평온이 왔다. 이 자리, 이 순간 나는 완전히 살아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녹색 재킷의 지퍼를 올리며 저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남미 다섯 나라의 바람이 동시에 내 뺨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고대의 돌들, 밀림의 원, 바다 위의 얼굴들, 구름 아래의 절벽.

남미는 내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을 이렇게 오래, 이렇게 단단히 믿는가.

다섯 나라, 다섯 개의 이야기

이 여행은 완벽하지 않았다. 비가 왔고, 바람이 불었고, 추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날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불편함이 아름다움이 되는 순간들을 나는 남미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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