勉菴 崔益鉉 면암 최익현
조선 최후의 선비, 불굴의 기개로 나라를 지킨 항일 의병장
그의 삶과 정신을 따라가는 역사 이야기
1833 — 1906
"조약을 맺으려거든 먼저 내 목을 치라."
— 1876년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에서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린 74세의 노선비가 남긴 말입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죽음보다 의리를 더 무겁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인물 소개
경주 최씨의 후손,
포천에서 태어난 선비
화숙공파 27세손
내북면(신북면) 가채리
스승 이항로로부터 받음
(1846년 입문)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은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833년 12월 5일의 일입니다. 어린 시절 흉년으로 가세가 기울어 충북 단양, 양근(양평) 등지를 전전했으나, 1854년에는 온 집안이 다시 포천 가채리로 돌아와 탯자리와 재회했습니다.
14세 되던 1846년, 벽계에 있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항로는 당대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그에게서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는 마음(憂國如家)'을 배웠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면암(勉菴)'이라는 호를 내렸고, 이 이름은 훗날 역사에 길이 새겨졌습니다.
생애 연보
직언과 투쟁으로
이어진 73년의 삶
깊이 읽기
역사를 바꾼
세 번의 결단
1868년과 1873년, 선생은 당백전 발행의 폐단, 무리한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습니다. 사헌부 지평이라는 언관직에 있으면서 목숨을 건 간언이었습니다. 이 계유상소는 결국 조선 최대의 실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유배의 대가를 치렀지만, 한 선비의 붓 한 자루가 권력의 정점을 흔들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협상이 진행되자, 선생은 도끼를 짊어지고 광화문 앞에 엎드렸습니다. "저들은 우리와 화친을 맺자 하지만, 실상은 우리나라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려는 것이다." 당시 상소에 담긴 경고는 30여 년 뒤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언자적 통찰과 목숨을 건 항거, 이것이 지부복궐상소의 정신입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상소 투쟁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함을 알고 무장 의병 투쟁으로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의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에 응하고 대마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단식을 선언하며 순국한 선생의 마지막은, 지식인이 어떻게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장엄한 장면입니다.
대를 이은 충심
손자 염재 최면식
독립운동가의 길
구국의 정신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면암 선생의 친손자인 염재 최면식(念齋 崔勉植, 1891~1943)은 경주 최씨 화숙공파 29세손으로, 역시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가 대마도에서 순국하는 참담한 비극을 목격했음에도, 그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염재 최면식 (1891 ~ 1943)
면암 선생의 친손자, 항일 투쟁의 계승자
대한광복회 활동: 1910년대 국내 핵심 무장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독립군 무장 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과 조달의 핵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망명 계획과 옥고: 1914년 만주 망명을 통한 무장 독립 투쟁을 계획하고 황해도 해주 등지에서 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끊임없는 투쟁과 순국: 출옥 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국내외 독립군 조직과 비밀 연락을 유지하며 활동했습니다. 거듭된 투옥과 혹독한 고문 끝에, 광복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포천의 성소
채산사(茝山祠)
충절을 기리는 사당
채산사 —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후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자, 포천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1907년에 사당을 건립했습니다. '채산(茝山)'은 '향기로운 풀이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선생의 곧은 절개와 애국 정신이 후세에 길이 향기를 낼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항일 정신의 상징이었기에 일제의 탄압도 거셌습니다. 1920년 일제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훼철되었고, 1935년 유림들의 노력으로 재건되었으나 1943년에 또다시 훼철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광복 이후 다시 복원되었으며, 1976년 8월 27일 경기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채산사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손자 염재 최면식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습니다. 포천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이곳에서 향사를 올리며 두 분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향길운 풀이 있는 산 채산 포천 가채리 채산사의 사회공헌활동이 적극 이루어질수 있는 사회공동체 활동 시스템이 이루어지길.....
역사에서 배우다
면암 선생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세 가지
'와인병다육이마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하늘이 정한 절기 조상이 이어온 제례 (0) | 2026.04.30 |
|---|---|
| 우리 마을 지붕에서 수익이 쏟아진다 (2) | 2026.04.25 |
| Choi Chi-won 孤雲 신선이 된 천재의 고향 (1) | 2026.04.24 |
| 우리 마을 지붕이 자본이 된다 햇빛소득마을이 바꾸는 농촌 경제 (0) | 2026.04.14 |
| 경주최씨 화숙공파 참의공파무자 석자 할아버지 할머니 묘비 연구 2 (0) | 2026.04.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