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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병다육이마을이야기

조선 최후의 선비 불굴의 기개로 나라를 지킨 항일 의병장 그의 삶과 정신을 따라가는 역사 이야기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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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이 낳은 대한민국의 국혼(國魂)

勉菴 崔益鉉 면암 최익현

조선 최후의 선비, 불굴의 기개로 나라를 지킨 항일 의병장
그의 삶과 정신을 따라가는 역사 이야기

1833 — 1906

 

"조약을 맺으려거든 먼저 내 목을 치라."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린 74세의 노선비가 남긴 말입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죽음보다 의리를 더 무겁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 1876년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에서

경주 최씨의 후손,
포천에서 태어난 선비

본관 · 가계
경주 최씨
화숙공파 27세손
출생지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신북면) 가채리
호(號)
면암(勉菴)
스승 이항로로부터 받음
스승
화서 이항로
(1846년 입문)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은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833년 12월 5일의 일입니다. 어린 시절 흉년으로 가세가 기울어 충북 단양, 양근(양평) 등지를 전전했으나, 1854년에는 온 집안이 다시 포천 가채리로 돌아와 탯자리와 재회했습니다.

14세 되던 1846년, 벽계에 있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항로는 당대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그에게서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는 마음(憂國如家)'을 배웠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면암(勉菴)'이라는 호를 내렸고, 이 이름은 훗날 역사에 길이 새겨졌습니다.

직언과 투쟁으로
이어진 73년의 삶

1855년 · 23세
과거 급제 — 관직의 시작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성균관 전적, 순강원 수봉관,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며 핵심 언관(言官)으로 자리를 잡아갑니다.
1868년 · 36세
고종에게 '시폐 4조' 상소
경복궁 중건 공사 중단, 백성의 재물 수탈 금지, 당백전 폐단 혁파 등을 내용으로 한 과감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원군의 실정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으로, 고종은 감탄했으나 결국 삭직과 유배 처분을 받았습니다.
1873년 · 41세
계유상소 — 흥선대원군 하야의 계기
대원군의 10년 권력을 직격한 계유상소를 올렸습니다.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격변이 일어났고, 결국 절대 권력이었던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소의 문구가 과격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습니다.
1876년 · 44세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 —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엎드리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 논의가 시작되자, 도끼를 짊어지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결사반대했습니다. "조약을 맺으려거든 먼저 내 목을 치라"는 절절한 항거였습니다. 일제의 경제 침탈과 훗날의 망국을 정확히 예견한 통찰이었으나, 흑산도 유배령을 받았습니다.
1895년 · 63세
을미사변 이후 — 위정척사 운동의 전환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의 유생들과 집단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 운동은 더욱 강경하고 무력적인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05년 · 73세
을사늑약 체결 — '청토오적소'를 올리다
을사늑약이 불법·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박제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의 처단을 요구하는 청토오적소를 올렸습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항일 의병 투쟁으로 방식을 전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6년 · 74세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 대마도 순국
일흔 넘은 노구로 전북 태인에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관군과의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체포에 응하였고, 일본 대마도(쓰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적군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선언하고, 그해 이국땅에서 순국하셨습니다.
1907년
전국민의 슬픔 속에 귀환 — 논산에 가매장
부산에 시신이 도착하자마자 각계각층의 국민이 애도하며 몰려들었고,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일제는 두려워했고 운구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오다 논산에 이르러 가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유언("고향으로 돌아가 묻어달라")은 일제의 강압으로 끝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기리어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역사를 바꾼
세 번의 결단

1 최고 권력에 맞선 직언 — 흥선대원군 하야

1868년과 1873년, 선생은 당백전 발행의 폐단, 무리한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습니다. 사헌부 지평이라는 언관직에 있으면서 목숨을 건 간언이었습니다. 이 계유상소는 결국 조선 최대의 실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유배의 대가를 치렀지만, 한 선비의 붓 한 자루가 권력의 정점을 흔들었습니다.

2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 지부복궐상소

1876년 강화도 조약 협상이 진행되자, 선생은 도끼를 짊어지고 광화문 앞에 엎드렸습니다. "저들은 우리와 화친을 맺자 하지만, 실상은 우리나라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려는 것이다." 당시 상소에 담긴 경고는 30여 년 뒤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언자적 통찰과 목숨을 건 항거, 이것이 지부복궐상소의 정신입니다.

3 74세 노구의 의병 봉기 — 대마도 순국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상소 투쟁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함을 알고 무장 의병 투쟁으로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의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에 응하고 대마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단식을 선언하며 순국한 선생의 마지막은, 지식인이 어떻게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장엄한 장면입니다.

손자 염재 최면식
독립운동가의 길

구국의 정신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면암 선생의 친손자인 염재 최면식(念齋 崔勉植, 1891~1943)은 경주 최씨 화숙공파 29세손으로, 역시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가 대마도에서 순국하는 참담한 비극을 목격했음에도, 그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 경주 최씨 화숙공파 29세손

염재 최면식 (1891 ~ 1943)
면암 선생의 친손자, 항일 투쟁의 계승자

대한광복회 활동: 1910년대 국내 핵심 무장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독립군 무장 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과 조달의 핵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망명 계획과 옥고: 1914년 만주 망명을 통한 무장 독립 투쟁을 계획하고 황해도 해주 등지에서 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끊임없는 투쟁과 순국: 출옥 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국내외 독립군 조직과 비밀 연락을 유지하며 활동했습니다. 거듭된 투옥과 혹독한 고문 끝에, 광복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채산사(茝山祠)
충절을 기리는 사당

경기도 기념물 제30호

채산사 —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후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자, 포천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1907년에 사당을 건립했습니다. '채산(茝山)'은 '향기로운 풀이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선생의 곧은 절개와 애국 정신이 후세에 길이 향기를 낼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항일 정신의 상징이었기에 일제의 탄압도 거셌습니다. 1920년 일제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훼철되었고, 1935년 유림들의 노력으로 재건되었으나 1943년에 또다시 훼철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광복 이후 다시 복원되었으며, 1976년 8월 27일 경기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채산사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손자 염재 최면식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습니다. 포천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이곳에서 향사를 올리며 두 분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향길운 풀이 있는 산 채산 포천 가채리 채산사의 사회공헌활동이 적극 이루어질수 있는 사회공동체 활동 시스템이 이루어지길.....

면암 선생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세 가지

01 / 지행합일(知行合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한다
선생은 머리로 아는 학문을 현실의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74세의 노구로 직접 의병을 일으킨 그의 삶은, 지식인의 책임이 글과 말이 아닌 '실천'에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02 / 지조와 절개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다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이국땅에서의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질과 편법이 만연한 시대에, 인간의 '품격'과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일깨웁니다.
03 / 공동체를 향한 헌신
나를 넘어 역사와 공동체를 생각한다
개인의 안위와 노년의 평안함을 기꺼이 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역사와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하는 거시적 책임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면암 선생은 한 평생을
꼿꼿한 대나무처럼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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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깊은 뿌리가 포천 가채리에서 시작되어, 경주 최씨 가문의 자랑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의 영원한 등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채산사를 찾아 직접 그 정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 경기도 기념물 제30호 채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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