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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테리어

운하가 속삭이던 날 나는 베네치아에서 길을 잃었다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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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북부 이탈리아

운하가 속삭이던 날,
나는 베네치아에서 길을 잃었다

트레비소, 베네치아, 베로나 낭만이 공기처럼 떠도는 곳에서의 여정

이탈리아 여정 북부 이탈리아 AI이미지
Day 1
베네치아에 내리던 빗소리 밀라노 말펜사 공항 → 트레비소

비행기가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오던 순간, 나는 창밖으로 처음 이탈리아 땅을 보았다. 포강 평야를 가로지르는 끝없는 초록빛 들판. 그 아래 어딘가에 베네치아가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도 실감나지 않았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서 내린 건 오전 열한 시였다. 시차 적응도 채 되지 않은 몸으로 나는 곧장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베네치아가 아니었다 베네치아에서 기차로 삼십 분 거리, 조용한 소도시 트레비소. 친구 마리아가 "진짜 이탈리아는 관광객이 없는 곳에 있다"며 강력히 추천한 도시였다.

"베네치아는 무대야. 트레비소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실제 삶이 흐르는 곳이지. 거기서 하룻밤만 자봐도 차이를 알 거야."

기차가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역 밖으로 운하가 펼쳐졌다  영화에서 수백 번 봤던 바로 그 풍경이. 하지만 기차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 장면을 오 초 만에 뒤로 흘려보내야 했다. 내일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트레비소에 도착한 건 늦은 오후였다. 기차역을 나오자마자 운하 냄새가 났다. 베네치아와는 다른, 더 풀 내음 섞인 시원한 냄새. 좁은 돌길을 걸으며 숙소를 찾는데, 골목마다 제라늄 화분이 창틀에 걸려 있고, 어딘가에서 에스프레소 향이 흘러나왔다. 이탈리아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그제야 밀려왔다.

 

트레비소 첫날 저녁 장면

숙소 근처 작은 오스테리아에서 스프리츠를 한 잔 시켰다. 주인 아저씨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고 나는 이탈리아어를 세 마디밖에 몰랐다. 그래도 어찌어찌 대화가 됐다. 손짓, 눈짓, 그리고 와인 한 잔. 그게 트레비소에서의 첫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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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길을 잃는 것이 목적인 도시 베네치아 도보 여행

베네치아에는 지도가 필요 없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한다. 지도를 보면 오히려 놓친다. 리알토 다리를 찾아가다가 우연히 들어선 골목에서, 아무도 없는 작은 광장을 발견했다. 비둘기 몇 마리와 석조 우물 하나, 그리고 오전 햇살. 그게 그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곤돌라를 탈까 말까 오래 망설였다. 관광객 냄새가 너무 난다는 생각에. 그러다 결국 탔다. 그리고 완전히 항복했다. 곤돌리에레가 노를 젓는 리듬, 건물 사이로 좁아지는 운하, 다리 아래를 지나는 순간의 서늘함. 그 오십 분이 베네치아 전체를 설명해주었다.

산마르코 광장은 아침 여섯 시에 가야 한다. 그 황금빛 성당 정면이 새벽 햇살을 받는 삼십 분, 관광객이 밀려오기 전의 그 고요함. 나는 광장 한가운데 서서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무언가 웅장한 감상이 와야 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냥 평화로웠다. 몇백 년 된 돌바닥이 발바닥에 느껴지는 그 감촉이.

베네치아는 사진보다 작고, 기억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미로 같다  하지만 어느 골목을 돌아도 결국 물이 나온다.

오후 늦게 베네치아 마스크 공방 골목을 걸었다. 파페토 가게 주인이 파피에 마셰 기법으로 마스크를 직접 만들어 보여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작은 검은 마스크 하나를 샀다. 벽에 걸어두려고. 사용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Day 3
줄리엣은 실재했을까 트레비소 → 베로나

베로나행 기차 안에서 나는 창밖 포도밭을 보며 생각했다. 베로나가 낭만적인 도시라는 건 알겠는데, 나 같은 혼자 여행자에게도 그 낭만이 유효할까.

아레나 디 베로나 앞에 섰을 때 그 의문이 사라졌다. 기원후 30년에 지어진 로마 원형 경기장. 지금도 매년 여름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 그 거대한 돌 구조물 앞에 서면, 이천 년이라는 시간이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라 실체로 느껴진다. 이 돌 하나하나에 로마 석공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사실.

줄리엣의 집 — 관찰 기록

줄리엣의 발코니 앞은 예상대로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인증사진을 찍느라 줄을 섰다. 발코니 아래 벽에는 사랑의 메모지와 껌으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다소 비위생적이지만, 그 안에서 어딘가 진짜 감정들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여기 와서 정말 울었겠구나 싶었다. 사랑도, 상실도, 기대도 담긴 낙서들. 줄리엣이 허구의 인물이어도 감정은 진짜였다.

피아차 에르베는 베로나의 심장이다. 로마 시대 포럼이었던 이 광장에, 지금은 청과물 시장이 선다. 나는 젤라토를 한 손에 들고 광장 돌바닥에 앉아 한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베로나 사람들은 유난히 잘 차려입고 다닌다는 느낌이었다. 장 보러 나온 할머니도, 학교 마치고 나온 아이들도.

베로나는 베네치아의 화려함도, 밀라노의 세련됨도 아닌 제3의 이탈리아다. 돌과 와인과 오페라가 공존하는, 단단하게 살아있는 도시.

저녁엔 바르돌리노 와인 한 병과 리조또 한 그릇으로 식사를 마쳤다.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아레나의 조명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 저 안에서 오페라 리허설이 있다고, 웨이터가 알려줬다. 들리지 않는 음악을 상상하며 와인을 마셨다.


Day 4
이탈리아 최대의 호수에서 자전거를 탄 오후 가르다 호수 당일 투어

 

가르다 호수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이건 호수가 아니라 바다인데'였다. 반대편 기슭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알프스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 거대한 분지를 채우고, 그 주변으로 레몬 과수원과 올리브 나무가 자란다.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얼마나 다양한 지형을 품고 있는지.

시르미오네 반도를 자전거로 달렸다. 호수 바람이 시원했고, 오렌지색 지붕들이 물 위에 반짝였다. 스칼리제로 성이 호숫가에 서 있었다  중세 시대 스칼리제리 가문이 지은 성벽이 지금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성벽 위를 걷다 보면 호수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가르다 호수의 일몰은 공평하다. 연인에게도, 혼자인 사람에게도, 노부부에게도 똑같이 아름답다. 자연은 낭만에 입장 제한을 두지 않는다.


Day 5
이탈리아여, 안녕 마지막 에스프레소와 귀국

마지막 날 아침, 나는 가장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항상 그렇다 더 붙잡고 싶어서, 아직 자지 않은 척 버티게 된다.

공항 가는 기차를 타기 전, 베로나 역 근처 바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서서. 설탕을 한 스푼 넣고 빠르게 한 모금에. 커피가 이렇게 진하고 쓰고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나라에 와서야 제대로 배웠다. 다섯 번의 아침 중 가장 빠르게 마신 커피였는데, 가장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공항 수속을 기다리며 기념품 가방을 열어봤다. 베네치아 마스크, 베로나의 작은 그림엽서 묶음, 가르다 호수 근처 농장에서 산 레몬 올리브오일 한 병. 그리고 트레비소에서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집어든 이탈리아어 시집 한 권  한 글자도 읽지 못하지만, 종이 냄새가 좋아서.

귀국 비행기 안에서 쓴 메모

이탈리아는 오감으로 여행하는 나라다. 운하 냄새, 에스프레소 맛, 돌바닥의 촉감, 오페라가 흘러나올 것 같은 광장의 공기, 그리고 매 시간 달라지는 빛의 색깔. 다음에 올 때는 한 도시에만 머물고 싶다. 움직이지 말고, 그냥 살아보는 것처럼.

여행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책상 위에 베네치아 마스크가 놓여있다. 매일 아침 그걸 보면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물론 한국 카페에서 산 것이지만.

이탈리아는 그리움을 남기는 나라다. 거기 있는 동안은 압도당해서 잘 모르는데, 돌아오면 그때서야 선명해진다. 트레비소 오스테리아의 스프리츠 색깔이라든가, 베네치아 골목의 습한 공기라든가, 가르다 호수에서 나란히 앉아있던 그 노부부의 실루엣 같은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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