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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테리어

야자수 그늘 아래 제주의 시간이 흐르다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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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그늘 아래, 제주의 시간이 흐르다

한림수목원, 3박 4일 제주 여행의 첫 번째 이야기


제주도에 첫발을 내딛던 날, 하늘은 유리처럼 맑았다.

공항을 벗어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돌담, 귤나무, 그리고 멀리 보이는 한라산의 실루엣. 빡빡한 일상을 떠나왔다는 실감이 비로소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여행 첫날의 목적지는 한림수목원. 제주 서쪽, 한림읍에 자리한 이곳은 단순한 식물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평생이 담긴 정원이다.

입구에서부터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수목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탁 트였다.

양옆으로 늘어선 부겐빌레아 화분들  붉고, 노랗고, 진분홍빛으로 타오르는 꽃들이 테라코타 화분에 가득 담겨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제1회 부겐빌레아 인 블룸(Bougainvillea in Bloom)" 이라 적혀 있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가 나란히 새겨진 그 안내판이 이곳이 단지 동네 공원이 아님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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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는 올레앤더(협죽도) 나무들이 키를 한껏 세우고 서 있었고, 붉은 벽돌 산책로가 저 멀리 야자수 숲 속으로 부드럽게 굽어 들어갔다. 첫 발걸음부터 이미, 이곳은 제주가 아니라 지중해 어딘가처럼 느껴졌다.

1971년의 씨앗이 만든 숲
한림수목원의 역사를 담은 안내판 앞에 잠시 발길을 멈췄다.

흑백사진 속에는 황량한 땅 위에 몸을 굽혀 씨앗을 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야자수길 1971."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웅장한 야자수 가로수길이, 반세기 전 누군가의 손으로 심어진 씨앗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설립자 송봉규 씨가 척박한 화산토 땅에 온갖 야자수의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키워냈다는 그 이야기가, 지금 내 눈앞의 풍경에 전혀 다른 깊이를 더했다.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 두꺼운 야자 줄기의 나이테 속에 5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온실 속, 핑크빛 터널
수목원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단연 열대식물 온실이다.

유리 지붕 아래로 들어서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늘 높이 치솟은 선인장들 사이로, 부겐빌레아의 진분홍 꽃잎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황금통선인장(에키노캑터스)들이 마치 초록색 공처럼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위로는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벽돌 산책로 위로 드리워진 꽃 그늘을 걸으면서, 이것이 정원인지 예술 작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선인장과 꽃이 공존하는 이 낯선 조화 건조함과 화려함이 한 공간에 어우러지는 것이 마치 제주라는 섬 자체를 닮은 것 같았다. 거칠고 투박한 화산 돌담 위에 수줍게 피어나는 꽃처럼.

돌과 나무, 그리고 돌하르방
수목원 곳곳에는 제주의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깎아 만든 돌하르방이 화단 한켠에 의젓하게 서 있고, 가족의 형상을 본뜬 석상이 아가베 선인장 군락 앞에 놓여 있었다. 가족 여행객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참 다정해 보였다. 또 어떤 벤치는 양쪽에 작은 돌하르방이 앉아 마치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사이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등 뒤로는 야자수 줄기들이 기둥처럼 하늘을 받치고 있었고, 발 아래로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이국적인 풍경 속에 앉아 있는데, 어쩐지 마음이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했다.

야자수길을 걷는 오후
카나리아야자(Phoenix canariensis)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양쪽에 도열해, 그 웅장한 잎을 하늘 쪽으로 활처럼 뻗어 자연스러운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붉은 벽돌 위에 무늬를 그렸다. 햇빛을 피해 양산을 든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느 유럽 정원의 풍경처럼 보였다.

이 길을 걷는 내내 생각했다. 여행이란 결국 일상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일이 아닐까. 제주의 바람이 야자 잎을 흔들고, 그 소리가 귓가에 가득 차는 이 순간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이 감각이야말로, 내가 이 섬까지 날아온 이유였을 것이다.

황금통선인장 밭에서
야자나무 아래 펼쳐진 푸른 잔디밭 한쪽에, 황금통선인장들이 가득 심겨진 언덕이 있었다.

크고 작은 구형의 선인장들이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배치한 조각품처럼 풀밭 위에 흩어져 있었다. 몇몇은 예쁜 도자기 그릇에 담겨 돌 위에 올려져 있기도 했다. 그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선인장은 물 없이도 오래 버티는 식물이라고들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것. 어쩐지, 이 수목원을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한림수목원에서 
발바닥이 약간 아려오는 게 느껴질 무렵, 수목원 출구 쪽 하얀 철제 게이트를 지나 나왔다.

돌아보니, 입구의 그 부겐빌레아 화분들이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모두에게 똑같이 환한 얼굴을 내밀면서.

한림수목원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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