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통장에서 장례비로 쓰면 괜찮을까?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쏟아집니다. 장례식장 결제, 영안실 사용료, 화장장 비용… 그런데 막상 결제를 하려고 보니 정작 본인 계좌에는 그만한 돈이 없고, 고인 명의의 통장에만 현금이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때 많은 유족이 머뭇거립니다. "혹시 이 돈을 쓰면 상속을 받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건 아닐까?", "나중에 빚이 많다는 걸 알고 상속포기를 하려는데, 지금 장례비로 돈을 인출하면 그 포기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비처럼 합리적인 범위의 지출이라면 상속포기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가 핵심이고, 이 기준을 넘으면 의도치 않게 상속을 단순승인한 것으로 처리될 위험이 있습니다.

왜 이런 걱정이 생기는 걸까
상속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빚과 재산을 모두 물려받는 단순승인,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승인, 그리고 아예 상속을 받지 않는 상속포기입니다.
문제는 민법에 "상속인이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는 조항이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고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써버리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부 상속받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인 명의 통장에서 단 몇십만 원이라도 꺼내 쓴 유족들이 "이러면 상속포기를 못 하게 되는 거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겁니다.
장례비와 공과금은 원칙적으로 괜찮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민법 제998조의2는 상속에 관련된 비용, 즉 세금이나 공과금, 상속재산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상속재산에서 충당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법조계에서는 이 조항을 근거로, 장례비 명목으로 고인의 예금 일부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곧바로 단순승인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병원비나 공과금을 정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지출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상적인 절차이기 때문에, 상속재산을 "내 마음대로 처분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입니다.
실제 법원 판단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약 1200만 원을 인출해 장례비로 쓴 사안이나, 장례식장 사용료 등으로 약 1170만 원을 지출한 사안에서 법원은 해당 지출을 정상적인 장례 비용으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장례 규모나 지역 물가, 조문객 수 등을 따져봤을 때 사회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합리적인 범위"일까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법원이 인정한 사례들이 모두 1000만 원대였다고 해서, 이 금액이 무조건적인 안전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역, 장례 방식(매장이냐 화장이냐), 조문객 규모, 장례식장 등급에 따라 적정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지출 유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인정받기 쉬운 지출: 장례식장 대관료, 음식 접대비, 화장 또는 매장 비용, 수의·관 비용, 영정 및 부고 관련 비용, 고인의 병원비·간병비 잔액, 공과금이나 세금 미납분
- 다툼이 생길 수 있는 지출: 지나치게 호화로운 장례용품 구입, 친족 간 여행이나 위로금 명목의 지출, 유족 개인 채무 변제, 명확한 근거 없이 큰 금액을 한꺼번에 인출하는 경우
핵심은 "이 돈이 고인을 보내드리는 데 합리적으로 필요했는가"와 "지출 내역을 입증할 수 있는가"입니다. 영수증, 장례식장 계약서, 청구서 등을 잘 보관해두면 나중에 분쟁이 생기더라도 소명하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상속포기를 계획 중이라면 이렇게 준비하세요
가족의 빚이 재산보다 많아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검토하고 있다면, 장례 절차를 진행하면서도 다음 사항을 챙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1. 지출 내역을 꼼꼼히 기록한다. 어떤 명목으로 얼마를 썼는지, 가능하면 영수증과 계좌 이체 내역을 함께 보관합니다.
2. 가능하다면 별도 계좌를 활용한다. 고인 명의 계좌에서 직접 결제하기보다, 일단 본인 자금으로 결제하고 나중에 상속재산에서 정산받는 방식을 택하면 분쟁의 소지가 줄어듭니다.
3. 큰 금액의 처분은 피한다. 장례와 무관한 목적으로 고인의 예금이나 부동산, 자동차 등을 처분하는 행위는 단순승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고려하고 있다면 이런 처분은 절대 피해야 합니다.
4. 상속포기·한정승인 신고 기한을 놓치지 않는다. 상속포기와 한정승인은 상속 개시(보통 사망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가정법원에 신고해야 합니다. 장례 절차에 신경 쓰다 이 기한을 넘기면 선택의 기회 자체가 사라질 수 있으니, 빚이 많다는 의심이 든다면 초기에 변호사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무리하며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 법적인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례비처럼 누구나 거치는 통상적인 지출은 상속포기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두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합리적인 범위"라는 모호한 기준 때문에 애매한 지출이 있다면, 미리 전문가와 상담해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글은 법률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변호사 등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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