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습지 겨울이 빚어낸 황금빛 서정
전남 순천 · 흑두루미 탐조 여행 3탄
어떤 장소는 처음 봐도 처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순천만이 그런 곳이었다.
겨울 햇살이 낮게 깔린 오후, 드넓은 갈대밭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들은 일제히 몸을 기울이며 마른 소리를 냈고, 그 너머로 둥글둥글한 산봉우리들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는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만 남았다.
순천만 습지. 국내 최대 연안 습지이자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국제 보호 습지. 그 이름이 품고 있는 무게만큼이나, 실제로 발을 들여놓으면 이 땅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살아 숨 쉬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01. 황금빛 갈대 — 겨울의 언어
순천만의 갈대는 봄여름의 초록을 지나 가을이 되면 황금으로 변한다. 12월의 갈대밭은 그 절정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갈색의 물결은 하늘의 구름 그림자를 그대로 담아내며 시시각각 빛을 달리했다.
갈대 사이로 난 나무데크 산책로를 걸으면, 좌우로 갈대가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있어 마치 황금 터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 아래, 나무데크로 만든 긴 탐방로가 갈대밭을 가로질러 뻗어 있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너무나 작아서, 순천만이 얼마나 광활한지를 단번에 실감하게 해 주었다.






02. 하늘을 수놓는 새들 — 흑두루미를 찾아서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흑두루미는 10월 말부터 3월까지 월동합니다.' 흑두루미 탐조대까지는 전방 400m. 겨울 순천만을 찾은 가장 큰 이유였다.
수백, 수천 마리의 새 떼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르는 장면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새들은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육안으로 바라보면 그 장엄함에 숨이 막혔다. 석양빛 하늘 아래 실루엣으로 펼쳐지는 군무는, 오직 이 계절, 이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쑥부쟁이와 갈대 사이로 오리 떼와 기러기 떼가 내려앉아 먹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물웅덩이에 비치는 하늘, 그 위로 줄지어 나는 새 떼. 겨울 순천만은 새들의 왕국이었다.



03. 물길이 그리는 곡선 — 순천만의 심장
순천만에는 S자로 굽이치는 아름다운 물길이 있다. 갯벌과 갈대밭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그 물길은 하늘의 구름을 통째로 반사하며 거울이 되었다. 물가에는 오리 떼가 줄을 이어 앉아 있었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다도해의 섬들이 아련하게 보였다.
선착장에는 배 몇 척이 조용히 묶여 있었다. 황토색 갈대와 잿빛 구름, 그리고 은빛 물이 만들어 내는 색의 조화는 어떤 화가도 그대로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순천만의 아름다움은 화려하지 않다. 다만 깊고, 고요하고, 오래된 것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갈대밭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갈대 사이로 긴 그림자가 뻗어 나갔고, 하늘은 분홍빛과 회색이 뒤섞인 미묘한 색으로 변해 갔다. 사진을 찍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04. 생태공원 산책 — 겨울 나무 아래에서
습지 입구 쪽 생태공원에는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이 긴 가로수 길을 이루고 있었다. 낮은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나무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 그 길 끝에는 나무데크 전망대가 있어, 갈대밭과 물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공원 한켠에는 커다란 화강암 달걀 조형물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연 속 조형물이 어색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순천만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마치 새들이 낳고 간 알처럼, 그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한 할머니가 핸드폰을 들고 갈대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인지 오래 눈에 남았다. 순천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사진가도, 조류학자도, 그냥 걷고 싶은 사람도.









에필로그
오늘 찍은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수백 장의 사진 중 어느 것 하나 '이게 순천만이야'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갈대도, 새 떼도, 물길도, 노을도.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야 비로소 순천만이 되었다.
자연이 주는 감동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바람을 맞으며, 흙냄새를 맡으며, 새소리를 들으며. 순천만은 그런 곳이었다. 가장 단순한 것들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이 겨울 갈대밭이 조용히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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