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병다육이부부의 제주여행 한림수목원은 뜨거웠다.
유월의 제주는 뜨거웠다.
육지와는 다른, 어딘가 짭조름하고 두터운 공기. 우리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역시 제주다" 하고 웃었다. 다육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안다 햇빛이 강하고 바람이 많은 곳일수록 식물이 얼마나 건강하게 빛나는지를. 그 설렘을 안고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바로 한림수목원.

분홍빛 폭발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부겐빌레아였다. 진분홍, 자주, 빨강, 그리고 노란빛까지 서로 다른 색의 부겐빌레아들이 뒤엉켜 하늘을 향해 폭발하듯 피어 있었다. 가지와 가지가 서로 팔을 걸고, 꽃과 꽃이 어깨를 맞댄 채 빛 속에서 일렁였다.
와인병다육이머슴은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를 누르는 손이 바빠졌다.
"이거... 한 컷으로 다 담아지질 않아."
그렇다. 이 풍경은 사진 한 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눈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부겐빌레아 특유의 포엽은 얇고 가볍지만 그 색만큼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자주빛과 분홍빛이 섞이며 내뿜는 그 색감은, 마치 누군가 캔버스에 물감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것 같았다.
저 멀리, 부겐빌레아 커튼 사이로 크림색 꽃무더기가 보였다. 연노랑과 흰색 사이 어딘가의 색을 가진 부겐빌레아. 우리가 흔히 보던 분홍이나 빨강이 아닌 그 희귀한 색이 무성한 자주빛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모두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파티장 한가운데 혼자 조용히 샴페인을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유카 꽃, 처음 보는 얼굴
한림수목원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목원 중 하나다. 1971년부터 조성을 시작했으니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그 세월만큼 나무들은 키가 크고 그늘이 깊었다.
걷다 보니 낯선 꽃이 눈에 들어왔다. 가는 잎이 뾰족하게 사방으로 뻗은 식물 위로, 크림빛 종(鐘) 모양 꽃들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유카(Yucca)였다.
"우리 유카 화분은 꽃 한 번 못 봤는데."
남편이 중얼거렸다. 집에서 작은 화분으로 키우는 유카는 몇 년째 잎만 내밀고 있으니, 이렇게 활짝 꽃을 피운 유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종처럼 고개를 숙인 흰 꽃들이 줄기 전체를 수놓은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우아했다. 다육이와 선인장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이 장면은 꽤나 감동적인 한 페이지였다.
분재원 시간을 기르는 곳
부겐빌레아의 화려함에서 조금 벗어나자, 공기가 달라졌다.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묵직한 곳. 분재원이었다.
크고 작은 화분들 안에서 나무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화분 안에서 버텨온 나무들. 굵은 몸통이 비틀리고 가지가 기묘하게 뻗은 그 형태는, 인위적이면서도 어딘가 깊이 자연스러웠다.
표지판에는 '먼나무(Ilex rotunda)' 쿠로가네모치, 영어로는 Kurogane holly. 제주와 일본, 중국에 자라는 상록수로 새들이 즐겨 먹는 빨간 열매를 맺는다고 적혀 있었다.
나무 곁에는 낡은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잠시 앉아 그늘 속에서 분재들을 바라봤다. 작은 화분 안에서도 나무는 나무답게 살고 있었다. 우리가 작은 화분에서 다육이를 키우는 것처럼, 크기가 작다고 해서 삶이 작은 건 아니라는 걸 이 나무들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돌과 조각 사이를 걷다
수목원 곳곳에는 돌 조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추상 조각들이 벽돌 길 위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고, 한쪽에는 태고의 형태를 닮은 돌들이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인 작은 연인상도 있었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형태였다.
하얀 자갈을 깔아놓은 구역에는 긴 나무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주변에 이름표를 단 분재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제주 특유의 검은 현무암 덩어리 하나가 자갈 위에 불쑥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마치 저 혼자 산책 나온 돌 같았다.


제주의 항아리들
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탁 트인 풀밭이 나타났다.
그곳에 항아리들이 있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옹기 항아리들이 잔디 위에 늘어서 있었다. 붉은 황토색에서 짙은 검갈색까지, 세월에 따라 각기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함께 놓인 둥근 맷돌들이 그 사이사이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초가지붕 옆으로는 돌담 위에 항아리들이 가득 줄지어 서 있었다. 항아리 하나하나가 배처럼 볼록하고 든든한 형태 제주식 허벅을 닮은 듯도 하고, 독립된 조각품 같기도 한 그 항아리들 위로 초가지붕의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저 안에 뭐가 담겨 있을까?"
남편이 물었다.
"세월이요."
내가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웃었다.




돌하르방과 초가, 그리고 살아있는 제주
수목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은 점점 더 제주다워졌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돌담과 함께 낮고 둥근 초가집들이 이어졌다. 지붕을 단단히 눌러맨 짚의 격자무늬가 정갈했다. 돌담 옆으로는 대나무 울타리가 서 있고, 그 사이로 작은 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당에는 돌하르방이 서 있었다. 둥그스름한 눈, 납작한 코, 두 손을 배 위에 모은 그 익숙한 얼굴. 그런데 오늘은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사람처럼,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반겨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으로는 돌을 갈고 있는 여인 조각, 아이를 업고 서 있는 어머니 조각이 있었다. 투박한 돌로 빚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섬세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 일하고, 아이를 키우고, 버티고 살아온 이야기들이 조각 속에 조용히 새겨져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말 조각 두 마리가 마주 서 있었다. 제주 조랑말을 닮은 그 조각들은 크기만 클 뿐 어딘가 순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말은 떼어낼 수 없지"라며 남편이 말했다.
칠면조도 있었다. 울타리 안에서 두 마리가 한가롭게 쉬고 있었는데, 이름표에는 '칠면조 (Meleagris gallopavo)' 라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보았다면 눈이 동그래졌을 것이다.





한림수목원을 나서며 아직 끝이 아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도 아직 다 보지 못했다.
한림수목원은 그런 곳이었다. 꽃 하나, 나무 하나, 돌 하나에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어 있는 곳.
부겐빌레아의 분홍빛에서 시작해서, 수십 년을 버텨온 분재들의 침묵을 지나, 항아리와 돌담과 초가와 돌하르방의 제주다운 풍경으로 이어진 오늘의 산책.
다육이를 키우는 우리에게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식물이 시간과 함께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가꿔온 사람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한림수목원, 아직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창조적이고 유니크한 와인병다육이의 세상사는 이야기
kenny762.tistory.com
'플랜테리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림수목원과 이모카세의 맛 (1) | 2026.06.10 |
|---|---|
| 제주의 숨결을 담다 한림수목원에서 (1) | 2026.06.10 |
| 한림수목원에서 시간을 잃다 (2) | 2026.06.09 |
| 초록이 숨 쉬는 곳 한림수목원을 걷다 (0) | 2026.06.09 |
| 야자수 그늘 아래 제주의 시간이 흐르다 (0) | 2026.06.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