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빚은 제주의 시간 속으로 수월봉 트레일 하루
오마카세의 여운이 아직 혀끝에 남아 있었다. 늦은 점심이었지만 배는 이미 항복을 선언한 지 오래. 식당 문을 나서며 남편이 배를 두드리며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제주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였다.

현무암이 깔린 해안, 두 사람의 산책
식당 근처 해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검고 거친 현무암들이 파도에 씻기며 반짝였다. 이 돌들은 수만 년 전 제주가 불과 함께 태어나던 그 순간의 흔적이다. 크고 작은 돌들이 제멋대로 쌓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질서가 있었다. 바다는 그 돌들 사이를 차분하게 채우며 너울거렸다.
아내와 나란히 걸으며 별말 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멀리 작은 등대 하나가 바다 위에 외롭게 서 있었고,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수월봉 트레일 입구에서
해안 산책을 마치고 수월봉 트레일 코스로 향했다. 주차장 옆 안내판에는 A, B, C 세 가지 코스가 그려져 있었고, 제주도 지질공원이라는 설명도 곁들여 있었다. 제주는 201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섬. 발아래 딛고 있는 이 땅 자체가 살아있는 지구과학 교과서인 셈이다.
화장실을 먼저 들렀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언덕 위로 선명한 단청의 정자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초록 풀밭 위에 붉은 난간을 두른 그 정자는, 마치 누군가 제주 하늘에 그림을 붙여놓은 것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정자 주변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형 카메라에 삼각대, 조명까지 갖춘 사진 작가들이 줄을 서다시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경치를 담으러 전국에서 모여드는구나 싶었다. 잠시 정자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지간신경통의 발바닥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오늘의 몸은 여기까지라며, 미련을 뒤로하고 차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운전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멀리 바다 냄새가 창문 틈으로 흘러들었다. 왈프가 혼자 수월봉 엉앙길로 내려갔다. 이곳은 주차 공간이 워낙 좁아 차를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았고, 두 사람이 함께 내려가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들고 간 건 휴대폰 하나뿐이었지만, 찍어온 사진들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엉앙길이 품은 지구의 기억
수월봉의 해안 절벽은 이름하여 화산쇄설암층. 수만 년에 걸쳐 화산이 뿜어낸 화산재와 자갈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지층이다. 직접 보면 말문이 막힌다. 파도가 조각하고 바람이 다듬은 그 단면은, 마치 지구가 스스로 써 내려간 일기장 같다. 연한 황토빛과 짙은 회색이 교차하며 굽이치는 그 무늬는 어떤 예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절벽 아래로 걷는 엉앙길 산책로에는 나무 난간이 이어지고, 그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숨을 참을 만큼 아름답게 펼쳐진다. 수평선 위로 섬 하나가 실루엣처럼 떠 있었고, 바람은 풀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언덕 꼭대기의 하얀 레이더 돔은 마치 외계에서 내려앉은 것처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서 있었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해안선의 곡선과, 까만 현무암, 초록 풀밭, 그리고 새파란 하늘 이 네 가지 색이 한 화면에 담기는 순간, 제주는 그냥 섬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화가 된다.

사진을 못 찍은 아쉬움, 그래도 괜찮아
차 안에서 왈프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나는 연신 감탄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절벽의 지층, 해안선의 굴곡, 저 멀리 보이는 섬의 윤곽들. 아쉬움이 밀려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발이 아파 차에 남겨진 시간, 홀로 떠난 왈프의 발걸음, 그리고 나중에 함께 들여다본 사진들. 그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두 사람의 제주가 담겨 있었다.












다음에 오면, 꼭 두 사람이 함께 엉앙길을 걸어야지. 발이 아프면 천천히, 쉬어가면서.
수월봉 엉앙길은 제주올레 12코스의 일부이며, 차량 주차는 수월봉 정상 주차장을 이용하되 공간이 협소하니 일찍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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