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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테리어

바람 부는 섬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by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202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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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 제주도 여행기

바람 부는 섬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와인병다육이부부의 제주 3박 4일 송악산 · 정방폭포 · 쇠소깍

섬으로 가는 이유

제주는 늘 거기에 있었다. 지도 위 작은 점 하나, 한반도 아래로 툭 떨어진 섬. 그런데 막상 비행기 창밖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는 순간, 심장이 먼저 알아챈다. "아, 여기가 다른 세계구나."

다육이를 닮은 우리 부부는 선인장처럼 말이 없고, 건조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속으로는 물을 잔뜩 품고 있는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그 물을 쏟아냈다. 송악산의 절벽 위에서, 정방폭포의 물보라 속에서, 쇠소깍의 카누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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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둘레길 사진에 타이포그랙픽

송악산 둘레길 Songaksan
서쪽 끝, 송악산.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바람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세찬 건 아니다. 오히려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는 정도의. 우리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검은 현무암 절벽이 바다를 향해 무너지듯 서 있었다. 수천만 년의 화산 활동이 만들어낸 층층의 지층은, 마치 오래된 책의 페이지처럼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파도는 쉬지 않고 그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제주의 파노라마가 열린다. 오른편으론 형제섬과 산방산이 나란히 앉아 있고, 멀리 한라산의 실루엣이 구름 속으로 녹아든다. 검은 모래 해변, 에메랄드빛으로 넘어가는 바다색 그라데이션, 절벽 위에 아슬하게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

전망대에 오르니 관광객들이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셔터를 눌러댔다. 우리도 그랬다. 하지만 카메라를 내리고 그냥 서 있던 그 몇 분이,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남편의 어깨 온도.

정방폭포 Jeongbang Falls
"동양 유일의 해안 직폭(直瀑)"이라는 말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바다 위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 그 사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실물을 보는 순간 모든 설명이 무의미해졌다.

정방폭포사진에 타이포그래픽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자갈밭에 발을 디뎠을 때, 귓속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먼저였다. 쾅, 쾅, 쾅. 리듬도 없고 멈춤도 없는. 두 줄기 폭포가 23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쏟아지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얼굴을 적셨다. 눈물인지 물안개인지 구별이 안 됐다.
절벽 위에는 나무들이 거꾸로 자라듯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현무암, 초록의 이끼, 흰 물줄기. 셋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색채는 무슨 필터도 필요 없는 자연의 예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돌 위에 서서 폭포를 올려다봤다. 서로 말이 없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모두 그냥 서 있었다.

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손을 꼭 쥐었다. 별말 없이, 그것으로 충분했다.

쇠소깍 카누 Soegwi Canyon
쇠소깍. 이름이 낯설다. 제주 방언으로 '쇠'는 효돈천,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뜻이란다. 한라산 눈 녹은 물이 흘러흘러, 마침내 바다와 만나는 그 끝자락.

쇠소깍 카누사진에 타이포그래픽

투명카누를 타고 물 위에 올랐다. 바닥이 비치는 배. 발아래로 까만 현무암과 짙은 녹색의 수초가 유리창처럼 보였다. 노를 저을 때마다 물이 잔잔히 갈라졌고, 양쪽 절벽에서 드리워진 나무 그늘이 물 위에 흔들렸다.

소나무, 팽나무, 이름 모를 넝쿨들이 절벽을 타고 자라는 이 좁은 수로는, 마치 세상 밖의 어딘가 같았다. 서울의 소음이, 월요일의 알람이, 인스타그램의 알림이 전부 사라졌다. 물소리와 노 젓는 소리만 남았다.
수로 끝에서 바다가 열렸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 색이 달랐다. 짙은 녹청색과 파란 바다색이 경계도 없이 섞이고 있었다. 우리 부부처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 그냥 섞여버린 것처럼.

배를 돌려 다시 수로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다음에 또 오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한 날이었다.

에필로그 
제주는 볼 것이 많은 곳이 아니다. 느낄 것이 많은 곳이다. 절벽 앞에서 말이 없어지고, 폭포 앞에서 눈물이 번지고, 물 위에서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그런 곳.

우리는 말수 적은 부부다. 하지만 제주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제주가 우리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나는 웃었다. 검은 돌처럼 묵직하고, 바다처럼 넓고, 다육이처럼 물을 품고 있는 섬. 우리랑 닮았다.

다육이는 물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안에 이미 가득 차 있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제주가 가르쳐 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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