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람이 머무는 곳 수월봉 엉알길과 오설록의 하루
와인병다육이부부의 제주 여행기
바람이 먼저 알아봤다.
제주의 바람은 육지의 바람과 다르다. 살갗을 스치는 게 아니라, 몸 안으로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간다. 수월봉 엉알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 바람이 우리 왈프를 반겼다.

수월봉 엉알길 지구가 쓴 가장 오래된 일기
현무암 위로 쏟아지는 제주 햇살은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다. 검은 바위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찼다 빠지기를 반복하고, 수평선 너머로는 비양도가 꿈결처럼 떠 있었다. 멀리 섬 윤곽 하나가 안개와 빛 사이를 유유히 떠다니는 광경을, 우리는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길을 따라 걷다 고개를 들면, 마치 거대한 책의 단면을 보는 듯한 절벽이 펼쳐진다. 수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할 때마다 쌓아올린 층층이 달라붙은 지층 황토빛과 검회색이 교차하는 그 결이 어찌나 정교한지, 자연이 아닌 어떤 예술가가 조각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돌멩이들이 지층 사이 사이에 박혀있는 모습은 마치 지구가 억겁의 시간 동안 꼭 쥐고 있던 비밀을 슬그머니 내보이는 것 같았다.
왈프는 절벽 아래를 한 번 더 올려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엉알길을 걸으며 우리는 자꾸 발걸음이 느려졌다. 빨리 걷기가 아까운 길이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가끔 들리는 새소리. 이 길은 서두르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 오설록 차 한 잔에 담긴 제주의 초록
수월봉의 감동이 아직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오설록으로 향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건 규모였다. 천장이 높고, 사람이 많고, 초록과 검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 펼쳐진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웅성거림이 가득했지만 묘하게 어수선하지 않았다. 커다란 화면에는 오설록의 철학 같은 것들이 흘러가고, 'PICK UP A / B'라는 안내판이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카페를 나와 잠깐 걸어가면 연못 하나가 나온다. 수련과 풀들이 물가에 무성하게 자라있고, 수면에는 나무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 제주는 이런 곳에서도 이렇게 예쁘구나.
사실 나는 커피파다. 차의 세계는 아직 낯설고 어렵다. 그래도 이날만큼은 제주를 마시고 싶었다. 시원한 잔 두 개가 트레이 위에 나란히 놓였다 하나는 탐스러운 황금빛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앉은 한라봉 음료, 다른 하나는 제주 녹차의 짙은 초록빛 아이스 음료. 첫 모금에 입 안 가득 한라봉 향이 터졌다. 달콤하고 상큼하고 시원해서 수월봉에서 달궈진 몸이 금방 풀렸다.
왈프는 녹차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진하네." 그게 칭찬인지 감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부부 여행은 이런 것
지층이 쌓이듯, 부부의 시간도 쌓인다.
엉알길의 현무암 위에서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던 순간, 오설록 연못가에서 아무 말 없이 풀냄새를 맡던 시간, 차가운 음료 두 잔을 앞에 두고 다음 목적지를 궁리하던 그 평범한 오후.
대단한 것이 없어도 좋았다. 제주의 바람 속에서, 수만 년 된 지층 앞에서, 차 한 잔 앞에서 우리 둘은 그냥 거기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였냐고? 그건 다음 편에서.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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