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 숲,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다
제주 2일차
제주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제의 맑음은 온데간데없고, 회색빛 구름이 섬 전체를 조용히 덮어가고 있었다. 오후엔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기에 우리 와인병다육이부부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말없이 서둘렀다. 목적지는 하나,

사려니 숲.
달리는 차창 너머로 제주가 흘러가다
차에 오르자마자 왈프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나치는 풍경들이 아까워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달리는 차 안에서 제주의 얼굴들이 하나씩 렌즈에 담겼다.
도로 한켠, 제주 현무암으로 쌓아올린 커다란 돌기둥 두 개가 나타났다. 이끼와 세월이 함께 붙어 자란 그 모양새가 꼭 오래된 문지기 같았다. 말없이 서 있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여기는 제주다" 라고 선언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조금 더 달리자 한국마사회 제주목장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초록 목초지와 하얀 울타리, 그리고 강한 바닷바람에 한 방향으로만 가지를 뻗은 나무들. 바람이 수십 년 동안 빚어낸 조각 작품들이었다. 제주의 바람은 그렇게 나무의 생김새까지 바꿔놓는다.
흐린 하늘 아래 구름은 낮게, 낮게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거운 하늘이 제주의 초록과 만나 오히려 더 짙고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맑은 날의 제주도 좋지만, 흐린 날의 제주는 또 다른 서정이 있다.







삼나무 가로수 숲이 먼저 손을 내밀다
사려니 숲에 가까워질수록 도로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키 큰 삼나무들이 줄지어 서더니, 어느 순간 그 나무들이 도로 위로 가지를 뻗어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 보아도 그 느낌이 전해졌다 숲이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다는 것이.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흐린 날씨에도 이 숲을 찾아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사려니가 가진 힘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냄새가 먼저 안아주었다
주차를 마치고 안내판 앞에 섰다.
사려니숲 무장애나눔길(Saryeoni Forest Barrier-free Trail) 총 길이 1.5km, 노폭 1.7m. 누구나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한 데크 길이 숲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도 속 숲의 윤곽을 눈으로 따라가며 잠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데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냄새가 먼저였다.
삼나무 특유의, 맑고 서늘하면서도 깊은 향기가 폐 속 깊이 들어왔다. 피톤치드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그 냄새는 그냥 자연이 품어주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맡아본 것 같은, 어딘가 기억 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냄새.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익숙하고, 안전한 향기.





삼나무 숲 속으로 시간이 느려지는 곳
데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세상의 소리가 지워졌다.
바람 소리, 이파리 스치는 소리, 나무 데크를 밟는 발소리만이 남았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삼나무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고, 그 사이로 데크 길이 저 깊은 곳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무언가가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무들의 키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가지들이 서로 얽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숲이 지붕을 만들어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듯했다. 그 아래에서는 오후의 비가 두렵지 않았다.
데크 옆으로는 고사리들이 빼곡하게 자라 초록 카펫을 깔아두었고, 군데군데 이끼 낀 나무 벤치가 놓여 있어 "잠깐 여기 앉아 숨 한번 고르고 가세요" 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사려니숲 이라고 쓰인 나무 프레임 앞에 섰을 때, 그 뒤로 펼쳐진 삼나무 숲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작은 나무 장식들이 프레임에 달려 살랑이고, 그 너머로 하늘 높이 뻗은 삼나무들이 묵묵히 서 있는 그 장면은 사진 속에 담으면서도 사진이 이 공기와 냄새와 소리를 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흐린 날의 숲이 더 깊었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 삼나무 숲은 더욱 신비로운 빛깔을 띠었다.
햇살이 쨍할 때의 숲이 화려하다면, 흐린 날의 숲은 깊다. 색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공기는 더 촉촉하고, 냄새는 더 진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그냥 이 순간에 있어도 되는 그런 공간.
오후에 비가 온다고 바삐 서두른 아침이었는데, 숲 안에 들어서고 나서는 그 초조함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비가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삼나무 숲이 지붕이 되어줄 테니까.

사려니가 내게 주는 영감
사려니 숲을 생각했다.
우리는 왜 숲을 찾는 걸까.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해서?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숲에 들어가면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온다. 마치 오래 떠나 있다가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것 같은 그 느낌.
사려니 숲은 그 느낌을 가장 잘 주는 곳이었다.
삼나무들이 만들어준 그 냄새와, 데크 위를 걷는 발걸음의 리듬과,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자연이 건네준 가장 고요한 선물로 채워졌다.
사려니숲은 계속이어진다.
와인병다육이세상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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